대학의 의미를 찾지못한 내가 결국 과탑이 된 이야기
3. 공단의 조립식 회사 20살 막내
첫출근을 하던 날 버스를 두 번 갈아타고 1시간30분을 가야했기 때문에 6시쯤 일어났다.
아직 찬바람이 떠나지 않은 겨울이라 해가 찾아오지 않은 방안은 어두웠고
출근 준비를 하며 지나가다가 본 엄마는 방에 돌아누워계셨다.
평소같으면 밥이라도 먹고 가야한다고 전 날 부터 음식을 해놓고 분주했을 엄마인데
숨겨지지 않는 눈물을 참느라 되돌아 누울수도, 일어날수도 없음을 알고있었다.
그리고 그 눈물은,
약속한대로 1년만 사회생활을 해보고
내가 돈 벌어서 경험을 쌓다가 대학에 가겠다던 약속을 늘 되새기게했다.
첫 출근 하던 날 늘 교복 위에 걸쳐입던 코트를 입고 장갑을 끼고 회사를 갔다.
버스에는 평소에 볼 수 없었던 이른 아침 출근하는 사람들이 가득했다.
회사는 오창 공단에 있었는데 편의점 하나 없는 공단 사이에 있었다.
추운 겨울에는 바람이 불면 부는대로 맞아야했고
화장실을 가려면 구름다리를 건너 반대편으로 가야했다.
구름다리는 지붕조차도 없는 곳이라 눈이나 비가오면 맞고가거나
그 짧은 거리도 우산을 써야했다.
첫 출근 날이었다.
회사는 학교처럼 시끌벅적하지 않았다.
무척 조용한데 딱딱하기까지한 회사 공기가 두려움이라는 선방을 날렸다.
내 이름을 "00씨"라고 부르는 인간미없는 명칭도 싫었다.
잠시 사무실에 앉아서 분위기 파악을 하다가
고등학교 담임선생님께 전화를 했던 기억이 난다.
괜찮냐고, 잘 이겨내라는 선생님의 수화기 너머 목소리가 그리웠다.
그렇게 회사 생활을 이어갔다. 아니다. 이겨내기 시작했다.
1층은 공장과 재고를 쌓아두는 창고가 있었다.
마당에는 지게차가 돌아다니며 재고를 옮기느라 바빴다.
차를 타면 1분, 걸으면 10분 이상 걸리는 근처 2공장에 가끔 자재를 가지러 이동해야했다.
특히 그 공장은 겨울에 정말 추웠다.
회사의 총 인원이 아마 130명쯤 되지 않았을까싶다.
내가 속한 사무실은 디자인팀, 영업팀, 제조/자재 팀이 있는 2층이었다.
나는 영업2팀에 소속되었다. 업무는 온라인 영업이었다.
카페24, G마켓, 옥션, 인터파크 등 온라인 채널에 업로드된 상품 주문이 들어오면
매일 같이 주문을 확인하고 포장팀에 넘겨주는 업무였다.
온라인 CS업무와 반품 관련된 업무도 진행했다.
사수였던 'H언니'를 따라다니며 일을 배웠고,
위에 언니들을 잘 맞춰주던 H언니는 사회생활의 표본이 되었다.
6개월 정도 같이 일을 했다.
H언니는 남자친구와 결혼하고, 부모님 가게를 이어받겠다며 회사를 떠났다.
회사 초창기 멤버인 'K과장'님이 계셨는데
하루는 한 달에 한 번 진행하는 직원 전체 예배에서 기도를 하셨다.
기도 내용은, 회사 초반에 화장지도 한 칸씩 아껴쓰며 지냈는데
지금 이렇게 성장하는 회사가 됐다며 눈물을 훔치셨다.
12년이 지난 지금 생각해봐도 사장님이 좋아할 수 밖에 없는 존재가 아닐까싶다.
동시에 요즘 찾아보기 힘든, 충성스러운 직원인 것 같다.
간혹, 자리를 비웠을 때 나랑 H언니 책상 서랍을 열어보고는
너무 더럽다며 정리좀 하라고 할 때가 있었다.
결벽증이라고 생각될 정도로 책상 위에 아무것도 없는 그 분에게는
우리가 서류와 과자를 넣어둔 서랍을 보고 그럴 수 있을 것 같았다.
(어쩌면 사다 놓기만 하면 ,각자의 서랍으로 없어지는 과자를 찾으러 다니시던걸까)
슬리퍼 소리 시끄럽다며 발뒤꿈치 들고 다니라는 등의 나름의 교육도 있었는데
윗사람들의 칭찬과 달리 친해지가 참 어려운 스타일이셨다.
'H 주임님'은 아침마다 나를 카풀해주던 분이셨는데
가끔 고마워서 추운 겨울에는 호빵을 데워가서 아침으로 나눠드렸다.
이제 막 고등학교를 졸업한 나에게는 참 신기한 사람이이었다.
전 날 친구들과 늦게까지 술을 먹었다며 술이 덜 깬 것 같다고 말하면서
아무렇지 않게 운전대를 잡고 회사까지 간다.
무섭지만 고마워서 아무 말도 하지는 않았다.
그냥 회사에 도착할 때 까지 호빵을 먹지 않았고 앞만 보고 있었다.
또 어떤날은 대학을 졸업하면 "네 친구중에 처녀인애가 없을걸?"하며
어린 나에게 다소 아니, 다분히 충격적인 발언을 했다.
당시에 나는 "어른이 돼서 어린 애한테 저런 저급한 말을 하고 싶을까"라고 생각하며
아직은 밝고 따뜻하기만한 세상을 더럽게 하는 사람이라고 느끼게했었다.
해장의 종류에 대해서도 알려줬다.
매운음식, 탄산음료, 햄버거, 오렌지 주스 등으로 해장을 하는데 본인은 오렌지쥬스라고했다.
당시에 나는 어째서, 매달 H주임님께 카풀비를 드릴 생각을 하지 못했을까.
부모님이 아셨다면 길길이 날뛰셨을일이다.
H주임님은 카풀비를 호빵으로 때우는건가 싶었을테지만 티를 내시지는 않았다.
뒤에서 욕을 했을수도 있지만 어째뜬 인내심이 깊은 사람이었던 것 같다.
다행히 나는 회사를 퇴사하면서 백화점에서 향수를 사드렸다.
그리고 퇴사 후 들린 소식에 의하면
H주임님은 어떤 남자분과 사고쳐서 결혼을 했다고한다.
말이 엄청나게 많고 드셌던 시츄같이 생긴 'D 언니'도 있었는데
모든 소문이 D언니로부터 퍼져서 가까이하면 안될 것 같았다.
시츄언니가 뭘 물어보거나 말하면 그냥 웃기만했다.
회사는 그냥 회사다웠다.
2주에 1번씩은 토요일에도 출근을 했다.
돌아가면서 아침에 회사 계단 청소도 했다.
명절에 굴비 15마리를 줬는데, 명절선물이 처음이라는 얘기도 있었다.
다과는 항상 부족해서 채워지는 날이면 금방 동났고 각자의 책상서랍으로 자리가 옮겨져있었다.
화장실에서 새끼뱀을 보고 소리질러 공장에 계신 아저씨들이 치워준적도 있었다.
조퇴라는 것도 모르고 있다가 이상하게 몸이 아픈 날 참다가 조퇴를 했는데
회사 셔틀버스가 운행하지 않는 시간이라 버스타러 가는데에만 1시간 넘게 걸어갔다.
걸어가다가 더 아파졌다.
어느날은 생리가 시작됐는데 까만색이었다.
잊고지낸사이, 생리불순이 3개월간 지속된걸 알았다.
처음보는 현상에 나는 암에 걸린줄알고 병원에갔다.
스트레스가 심해서 생리가 지속되지 않다가 한 번에 시작되서 그랬다고했다.
몸무게는 43kg에서 42kg대로 내려가고 있었다.
120만원이라는 첫 월급은 그야말로 내가 부자가 된 것 같이 세상을 다르게 보이게했었다.
그러나 6개월 정도 지나자 통신비, 교통비 등 공과금을 제외하니
사실상 내 용돈이 30만원도 되지 않았고 저축은 꿈도 꾸지 못하는 현실을 마주했다.
더불어 대학나온 언니들이 SWOT분석 등 경영학 단어를 써가며 회의를 할 때는
나만 모르는 용어에 위축이 되는 날도있었다.
무엇보다 돈을 벌어 다양한 경험을 하겠다고 했던 나는
퇴근 후 집에 돌아오면 지쳐서 뭘 할수도 없었다.
이 모든게 현실이었다.
미래는 불안했고 평생 이 급여로 살면 저축도, 결혼도, 미래가 없다고 생각했다.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회사생활 9개월만에 너무 거대한 사회를 알아버렸다.
아는 사람 회사여서 어디에도 불평하지 못했다.
그러던 어느 날 회사에서 CJ오쇼핑 본사에 다녀오라는 미션을 주셨다.
이 시기에 여러 회사들은 거점지역에 물류센터를 설립한 뒤
상품을 배송하는 풀필먼트(Fulfillment) 시장이 시작되었다.
쉽게말해 위메프, 쿠팡과 같은 회사들이 생겨나던 시기였다.
누가 이 풀필먼트(Fulfillment) 시장의 1인자가 될 것 인지를 두고
열띤 경쟁중이었다.
CJ오쇼핑도 이 사업을 시작했다.
자신들의 플랫폼에 상품을 맡기고 투자할 회사들을 모집하고자 세미나를 개최했다.
사실 나는 다녀오라고 해서 뭔지도 모르고 일 하나 더 배우나보다 하고 갔었다.
그리고 그 날이 내가 다니던 중소기업에 사직서를 내야겠다고 결심한 날이었다.
서울에 도착해 CJ오쇼핑 본사로 가는데 비가 오기 시작했다.
오전에 업무 세미나가 끝났고, 각자 점심을 먹고 다시 모여야했다.
외부로 점심을 먹으러 나가려고 했는데, CJ오쇼핑 현관 우산꽂이에 핑크색 우산이 한무더기 꽂혀있었다.
임직원을 위한 우산이므로 자유롭게 쓰고 가져다놓으면 된다고 써있었다.
무료였다.
나는 평소에도 회사에서 화장실을 가려면 지붕없는 구름다리를 비맞고 다녔는데,
맛없는 회사 식당밥을 안먹고 나가서 밥을 먹으려면 언니들 차를 타고 오창 시내까지 가야했는데,
심지어 회사 내부도 추운데다가 바닥 청소도 돌아가면서 해야했는데.
여기는 공짜 우산, 회사근처에 다양한 식당, 청소하는분, 경비실까지 있었다.
어이없게도 그 별거아닐 수 있는 일들이
학교도, 부모님도, 사회도 일러주지 않았던 공부할 동기부여가 되어주었다.
돈을 벌면 자유를 얻을 수 있을것이라고 기대하던 내게
경제적 자유보다 더 값진
학교를 가야할 주체적인 자유가 생긴것이었다.
4. 사직의사 그리고 대학준비
나도 CJ오쇼핑 직원도
똑같이 9시에 출근하고 6시에 퇴근을 한다.
나는 심지어 2주에 1번씩은 토요일도 출근까지 했다.
그런데 근무하는 장소만 다를 뿐 근무시간도 비슷한데
CJ오쇼핑에 근무하는 분들은 급여가 훨씬 높았다.
사원증도 있었다.
미래가 없지만 미래를 꿈꿔볼 수 있는 충분하나 나이였다.
이번에는 대학을 가지 않겠다고 결심을 했을 때 보다
고민이 훨씬 빨리 끝났다.
더운 여름이 지나고 날씨가 조금씩 선선해지기 시작했다.
날씨에 영향을 많이 받는 생산직 공장 어른들도
거친 입담이 조금은 온화하게 바뀌는 계절이었다.
(경동택배 아저씨가 화,목 요일마다 오셔서 주문들어온
미끄럼방지 매트를 배송하기 위해 싣고 가신다.
무거운데 배송비를 조금 준다고 늘 화를 냈었는데,
가끔 다과를 아껴서 손에 쥐어드렸더니 엄청 잘해주셨다.
친해진 덕분도 있겠지만, 날이 따뜻해지니
무거운 매트를 들어야 하는 아저씨도 힘이 덜 들었던지
사람이 한결 더 좋아지게하는 날씨였다.)
어째뜬 일하기 좋은 날
복도에서 마주친 팀장님께 드릴 말씀이 있다고했다.
밥은 맛없어도 먹고 살게 해주었던 1층 식당에 마주보고 앉았다.
퇴사를 하고 싶다고 말씀드렸다.
대학을 가야겠다고 말씀드렸다.
나를 CJ오쇼핑에 다녀오라고 했고
사장님의 아들이기도 했던 팀장님은 너무 태연하게 대답했다.
"언젠가 이런 날이 올 줄 알았고, 너무 잘된 일이라고 생각한다."
짧은 중소기업에서의 회사생활이 끝났다.
표면적으로는 내 목표와 다짐과는 다르게
모은 돈으로 별로 경험한것도 없지 지낸 것 같았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는것을 나는 잘 알고있었다.
영업 업무를 하며 이 좋은 제품을 온라인으로만 알리는것이 아쉽다고 생각했다.
주고객이 엄마들이었기 때문에, 주말이면 엄마들이 자주 모이는 키즈카페나 공원에가서
무료로 제품을 써보고 마음에 들면 할인가로 구매할 수 있도록 하고 싶었다.
엄마들이 고객이므로 브랜드 이미지가 중요했고 입소문도 빠르고 무서운 시장이었다.
회사가 안정기에 접어들어야했으므로 이벤트,마케팅,프로모션 등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었다.
그 때는 제품 하나만 봐도 할 수 있고, 하고 싶은 것들이 항상 생각이 났지만
너무 어려서 목소리를 내는 방법을 잘 몰랐다.
그나마 창고에 재고로 쌓여있는 캐릭터 미끄럼방지 스티커가 많아서
사은품으로 제공해보자는 의견을 냈었고 큰 용기였다.
다행히 잘 받아들여져서 좋은 성과가 났었다.
아는만큼 보인다는 얘기가 있듯이 뉴스에서 엄마, 아기와 관련된 내용이 나오면 관심이갔다.
아이가 쓰는 물건은 특히나 성분이 중요했기 때문에
간혹 CS문의로 제품의 성분을 문의하는 고객들이 있었다.
그런것을 온라인 채널에 같이 게재하는게 좋을 것 같다는 생각도 했다.
우리 제품이 아이에게 필수로 필요한 좋은 제품이었으므로
돈이 없는 미혼모 가정에도 종합 선물세트로 묶어서 기부도 하게 하고 싶었다.
단순히 제품만 판매하는데 주력할것이 아니라,
사회문제에도 도움이 될 수 있는 건강한 제품이 되게 하고 싶었다.
※ 출산선물로 아기 안전용품 세트를 줄 수 있게 출시해도 좋을 것 같다고 생각한다.
또한 엄마들은 자신을 위한 소비는 지독하게 아껴도
아이를 위한 것은 망설임없이 소비한다는 것도 알게됐다.
자연스럽게 실무에서 소비자행동론도 공부하게 된셈이다.
나는 영업을 하면서 마케팅,기획,언론,소비자 행동 등을
실무로 경험할 수 있었던 것이다.
다행히도 내게는 이 업무가 잘 맞았다.
그래서 현상에 있는 문제가 스트레스가 아니라
해결하고 응용하고 싶은 재미있는 일들이었다.
20살 9월
내가 우리나라 주입식 교육과 사교육이 맞지 않는 이유를 비로소 알게되었다.
나는 창의적이고, 자주적이고, 효율적이며, 사회문제를 이롭게 하고싶은 사람이었다.
교과서는 내게 이런것들을 알려준적이 없었다.
질문을 제한했고, 왜? 라는 단어를 활용하는 방법을 알려주지 않았다.
퇴사를 했지만 지금까지도 이 회사가 잘 되고 있는것이 내게 자부심이 된다.
근무하던 시기에는 회사 사정도 어려웠지만
지금은 굉장히 큰 회사가 되었다.
권사님과 팀장님은 가끔 소식을 주고받으며 지내고있다.
내게는 돈 주고도 배울 수 없는 사회를 알려준 곳이지만
사실 나를 채용하면서 권사님도, 사장님도, 팀장님도, 회사도 큰 부담이었겠지.
그럼에도 그 어떤 티를 내지 않고 받아주셨던것도 엄청난 일이라고 생각한다.
19살. 다시 돌아가도 이 회사가 나를 받아준다면
나는 이 회사를 선택할것이고, 선택해야하며, 가야만한다.
1년을 투자해 평생 먹고 살만한 해답의 일부를 찾았고
매일 퇴근 길 버스안에서 나 자신에 대한 생각을 통해
나에 대해 더 많이 알게되었다.
심지어 돈까지 벌어들인셈이다.
성공한 인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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